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혼란 시대 (문단 편집) == 배경 == 862년 [[류리크]]가 [[벨리키 노브고로드]] 주변을 평정하고 홀름가르트란 이름의 정착촌을 건설한 이래로 [[러시아/역사|러시아 역사]]에서 군주는 곧 류리크의 피를 이은 소위 '류리크 왕조'의 인물들이었다. 그리고 몽골의 침입과 함께 시작되는 러시아의 암흑기와 현대 러시아의 기틀을 닦은 [[모스크바 대공국]]까지 [[러시아인]]의 군주는 류리크의 부계 자손들이었다. 이로 인해 러시아 역사에서 류리크 왕조가 지니는 권위는 영원한 러시아의 지배자이자 군주에 해당할 정도로 절대적이었다. 그런데 1598년 류리크 왕조의 차르 [[표도르 1세]]가 적법한 후계자를 두지 못한 상태에서 급사하는 바람에 그만 그 혈통이 끊어지는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. 물론 당시 러시아에는 여전히 류리크의 부계 혈통을 이어온 자손임을 주장할 수 있는 귀족들이 있었으나 [[유럽 러시아|전 러시아]]를 통일한 모스크바 공작 [[이반 3세]]와 초대 루스 차르 [[이반 4세]]의 직계가 아니라는 점에서 차르위 계승의 정통성을 주장할 수 없는 인물들이었다. 당시 러시아가 [[서유럽]]마냥 [[살리카법]]과 [[귀천상혼]] 개념이 있어서 방계 왕족의 왕위 계승에 너무나도 익숙했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라서 결국 류리크 왕조의 단절을 막을 수는 없었다. 이러한 사태로 인해 잠시 표도르 1세의 황후이자 [[보리스 고두노프]]의 여동생이었던 [[이리나 고두노바]]가 임시로 차르를 맡았지만 곧 표도르 1세의 뒤를 이을 인물로 표도르 1세의 처남이자 섭정직을 맡고 있었던 보리스 고두노프가 선출됐고 [[이리나 고두노바]]는 힘에 이기지 못해 오빠에게 양보했다. 사실 왕가 직계의 단절로 방계 왕족이 뒤를 잇거나 어떻게든 그 계통을 찾아내고, 그래도 안되면 가장 가까운 인척을 내세워 뒤를 잇게 하는 것은 비일비재한 일이었다. 다만 문제가 있었다면 보리스 고두노프는 류리크 왕가 출신이 아니었다는 점이다. 이로 인해 많은 [[보야르]](대귀족)들과 민중들은 보리스가 차르를 계승했다는 것에 상당한 반감을 품고 있었다. 보야르들은 사사건건 [[디스]]를 퍼부어대는 상황을 빚고 말았다. 종국에는 자연 재해로 발생한 피해도 류리크 왕가 출신이 아닌 보리스가 차르가 되어 막장 정치를 펼쳤기에 그렇게 된 것이란 소문이 돌 정도로 상황이 악화되어 가고 있었다. 이런 혼란 속에서 자신이 류리크 왕가의 직계 혈통이자 그동안 죽은 걸로 알려진 [[이반 뇌제]]의 아들 우글리치 공작 드미트리임을 주장하는 인물이 나타나면서 마침내 [[헬게이트]]가 열렸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